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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 연구원 내 발간보고서 및 학술자료요청은 아래와 같이 신청해주시면 됩니다. | 연구원 학술자료요청방법 안내 | 관리자 | 968 | |||||||||
공지 | ‘뉴트로(Newtro)’와 도시재생 | 관리자 | 901 | ||||||||||
공지 | 최근 언론에서 사송택지개발 지구에서 출토된 구석기 유물을 새롭게 조명하는 기사가 실렸다. 사송택지개발지구는 국내 굴지의 공기업인 LH가 시행하는 대규모 택지 개발이다. 이 사업은 2005년부터 시행했으나 그동안 여러 이유로 최근에야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근래 이슈가 된 문화재 조사는 2011년부터 매장문화재 분포 유무를 파악하기 위한 시굴조사가 이뤄졌으며, 매장문화재 분포가 확정된 유적지에 대해서는 2017년 말께 최종적으로 문화재 조사가 완료됐다. 확인된 문화재는 후기 구석기를 비롯해 청동기 생활유적, 삼국시대 무덤, 고려시대 요지, 조선시대 무덤, 생활유적 등 구석기~조선시대에 걸친 복합 유적이다. 필자 역시 당시 양산에서 문화재 조사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송택지개발지구에서 확인된 유적 종류와 중요성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 와서 사송택지개발지구에서 확인된 중요 유물에 대해 거론되는 이유가 너무나 생뚱맞다. 쉽게 말해 ‘버스 지나간 후 손 흔드는 격’이다. 언론을 통해 보면 양산시는 개발 주체인 LH에 사송택지개발을 통해 얻은 수익금 일부를 양산시 문화시설 확충에 환원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이곳에서 출토된 유적과 유물을 양산시민이 공감할 수 있게끔 유물전시관을 건립해 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은 양산시립박물관 수장고 포화 상태와 연관이 있다. 예전에는 출토된 모든 문화재를 국립박물관 수장고에만 보관을 하도록 법으로 명기돼 있었다. 그러다가 불과 10년 전부터 지역 공립박물관 활성화를 위해 그 지역에서 출토 유물을 공립박물관 수장고에 보관하도록 허가해 줬다. 취지는 무척 좋았지만, 그러한 이유 외에도 당시만 해도 전국에서 각종 개발에 따른 문화재 발굴조사가 급증했고 여기에서 출토된 수많은 유물을 국립박물관에서만 감당하기는 인력과 예산이 너무 많이 소요되는 문제점도 있었다. 이제는 그 문제점을 지역 공립박물관에서 고스란히 되새김하게 됐다. 양산시립박물관의 경우 양산시 도시 개발이 크게 증가해 박물관 개관 후 현재까지 벌써 1만여점의 유물이 수장고에 보관돼 조만간 포화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사송택지개발지구에서 출토된 유물이 시립박물관으로 이관하게 됐다. 이곳에서는 양산시 최초의 인간 활동의 흔적인 후기 구석기 유적(4~5만년)을 포함해 청동기시대와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ㆍ조선시대에 걸쳐 출토된 1천200여점 유물이 나왔다. 그러다 보니 시립박물관 수장고 확장 문제가 대두했고, 지역 최초로 후기 구석기가 출토된 사송택지개발지구 유적 중요성이 재평가돼 이곳에 전시관을 건립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하지만 LH가 이제 와서 양산시 입장을 그대로 들어줄 리 만무하다. 문화재 발굴조사가 끝나고 2년이 지나서야 시립박물관 수장고 확장과 연관해 전시관을 건립해 달라는 예는 전국적으로 지금까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양산시도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LH에 전시관 건립 부지와 비용 전부보다는 건립 부지만을 요구하는 듯하다. LH 입장에서는 문화재 조사 당시에 양산시와 행정관청인 문화재청에서 구석기 유물에 대한 전시관 건립의 어떠한 내용도 없는 상황에서 굳이 많은 예산을 들여 이제 와서 전시관을 건립해 줄 하등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역 문화를 향유하고 싶은 양산시민 요구를 완강히 거절하기는 공기업인 LH 이미지에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을 것이 뻔하다. 상생 차원에서 LH는 양산신도시 개발을 통한 수익금 일부를 시민에게 환원해 공기업 본래 취지에 대한 책무를 다하는 측면에서라도 문화시설과 공간이 매우 부족한 양산시 입장을 충분히 이해해주길 바란다. 양산시 역시 두 번 다시 버스 지나간 뒤 손 흔들지 말길 바라며, 차후 양산시 중요 문화재에 대한 종합정비계획을 세워 넓은 시야를 가진 문화행정을 펼쳐주길 바란다. 양산시민신문, 뉴스>화요컬럼, 2019.12.03. http://www.ysnews.co.kr/default/index_view_page.php?part_idx=3240&idx=82293 | 사송택지에 유물전시관이 건립되길 바라며 | 관리자 | 960 | |||||||||
공지 | 「과거사 역사인식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양산시민신문, 2019.09.24. 오피니언 | 관리자 | 1009 | ||||||||||
공지 | 양산시에도 인문학 열풍이 불어오기를 근래 들어 서울특별시와 부산ㆍ대구ㆍ인천광역시 등에서는 시민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열풍이 매우 거세다. 그 열풍이 지금 차츰차츰 중견도시로 다가오고 있다. ‘인문’의 원래 의미는 인간의 변화 즉, 인간의 동선을 말한다. 이것이 후대에는 인간의 문화와 문명을 가리키는 말로 변했다. 그렇다면 인문학은 무엇인가? 인간과 인간의 근원 문제, 인간의 사상과 문화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이를 쉽게 말해 문사철이라고 한다. 븍 문학, 사학(역사), 철학을 의미하며, 인간의 배움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학문이다. 최근 대한민국 인문학 열풍은 인문학 강좌 증가뿐만 아니라 대형출판사인 교보문고의 인문학 서적 매출에서도 증명되고 있다. 그러나 인문학을 이끄는 문사철은 아이러니하게 우리나라 대학에서 가장 인기 없는 학과다. 사학(역사)의 경우는 그나마 전국적인 인문학 열풍을 등에 업고 설민석, 최태성 등과 같은 스타강사를 배출해 최근에는 그 관심도가 조금은 증가했다. 최근 지자체마다 시민의 인문학 열풍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문화원, 박물관, 미술관 등에서 스타강사 초빙은 물론 문화콘텐츠 연구ㆍ개발을 통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편성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는 이러한 인문학 강좌를 수강하는 시민 연령대가 대부분 50~60대라는 점이며, 대상 인원 범위가 한정돼 있다는 점이다. 필자 역시 가끔 박물관대학이나, 시민강좌에 강의를 나가면 절반 이상이 동일인이다. 인문학을 배우는 가장 큰 이유는 인문학을 통해 새로운 창의성과 인간관계에 대한 소통이라 규정하고 싶다. 이러한 인간의 새로운 창의성과 인간관계에 대한 소통은 50~60대에게도 꼭 필요하지만, 30~40대가 필히 알아야 할 기본 소양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양산시도 인구 35만을 눈앞에 둔 중견도시다. 그러나 정작 경남의 다른 시ㆍ군에 비해 인문학을 배우는 기관이 그리 많지 않다. 양산시와 비슷한 규모인 진주시는 6개 대학교의 평생교육원을 비롯해 국립진주박물관, LH박물관,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 진주문화원, 화석전시관, 각종 사립박물관, 경남문화예술회관 등 인문학과 관련한 기관이 매우 많다. 여기에 비해 양산시는 양산시립박물관과 양산문화원에 거의 편중해 있다. 그러다 보니 인문학 강좌를 수강하러 일부러 부산이나, 김해까지 가서 듣기도 한다. 양산시도 시민의 인문학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지역 대학교나 교육기관, 통도사 등과 적극 연계할 필요가 있다. 특히 웅상지역은 인구 10만 이상이 거주하지만 인문학 강좌에 대한 욕구를 충족해줄 만한 기관이 매우 부족하다. 이에 대한 대책이 매우 시급하다. 한편, 각 지자체에 있는 문화유산을 적극 활용해 시민의 인문학 소양을 함양하는 문화유산 교육사업이 전국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 사업은 각 지자체의 유명 인물, 고분군, 산성, 사찰, 향교, 서원, 요지 등을 대상으로 다양한 히스토리텔링과 새로운 전시ㆍ연출 등 프로그램을 통해 시민에게 지역의 소중한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을 심어주는 사업이다. 양산시도 시립박물관의 북정고분군 ‘달빛고분야행’이 시민에게 매우 큰 인기를 얻었다. 이처럼 양산시에도 고대로부터 근대까지 지역에 남아있는 지역 문화유산을 적극 활용해 많은 시민에게 지역 문화의 소중함과 시민의식을 심어줘야 한다. 한 발 더 나아가 이를 통해 문화유산 교육사업을 연구ㆍ개발해 더 이상 양산시민이 부산, 울산, 김해까지 가서 인문학 강좌를 듣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곧 양산시민의 지역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양산시민신문 기자 / 2019년 07월 02일 | 양산시에도 인문학 열풍이 불어오기를 | 관리자 | 619 | |||||||||
공지 |
| 양산의 히스토리텔링을 연구ㆍ개발하자 | 관리자 | 972 | |||||||||
공지 | 문화ㆍ관광의 도시 양산을 지향하며…
양산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무엇일까? 공단, 아파트, 인구증가, 도시개발, 신도시, 통도사, 배내골 대략 이 정도로 집약할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 이후 부산과 울산 사이에 위치한 양산은 양산산업단지를 기점으로 어곡산업단지, 산막산업단지 등 수많은 산업단지가 만들어져 김해시와 함께 신흥공업도시로 부상했다. 이후 1990년대 초반 부산광역시의 팽창으로 양산의 가장 넓은 충적지가 있던 물금에 대대적인 도시개발이 진행됐고, 새로운 신도시가 탄생했다. 지금 물금읍은 11만 인구로서 전국에서 가장 큰 행정 읍으로 성장했다. 웅상지역 역시 울산광역시의 영향으로 10만 인구가 모인 거대한 도시로 성장했고, 원도심지역에는 부산~양산 간 지하철이 착공돼 새로운 도시발전을 기대하고 있다. 이처럼 양산은 34만 이상의 중견도시로 성장해 최근 진주시를 제치고 도내에서 창원, 김해에 이어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로 급성장했다. 이러한 일련의 도시발전과 팽창으로 인해 양산시는 새로운 도시구조로 재편됐고, 여기에 맞춰 공무원 수도 많이 증가하게 됐다. 또한 다른 도시에 비해 공단 등이 많아 재정자립도가 높아 침체돼 있는 주변 도시에 비해 매우 활기찬 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도시 발전과는 반대로 지역 문화재가 상당수 사라지고 파괴됐다. 이러한 양상은 양산시뿐만 아니라 도시발전이 앞섰던 부산, 울산, 창원, 김해 역시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쳤다. 물론 가장 좋은 모델은 도시발전과 함께 지역문화가 융합해 성장하는 것이지만, 우리나라 도시화 역사에 비춰 보면 그러한 모범적인 모델을 가진 도시는 거의 없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듯 도시 곳곳에 있는 문화재가 도시개발에 의해 유실되거나 파괴된 후에 일정 기간이 지나서야 중요문화재에 대해 다시 복원하거나 수리하는 역사를 반복했을 뿐이다. 그 예로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신라왕경프로젝트, 백제역사복원사업, 가야사복원사업, 그리고 지자체인 서울시에서 추진하고 있는 한양도읍 오백년 복원사업 등이 대표적이다. 이 사업들은 수조원의 국민 세금을 들여 현재까지도 도시개발에 밀려 사라지고 파괴된 과거 찬란한 역사와 문화에 대한 복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유적 파괴는 어쩔 수 없는 우리나라 현대 문명사의 한 과정이지만 과거보다 훨씬 국민의 문화에 대한 인식수준이 높아진 만큼 앞으로는 더 이상 반복하는 과오는 범하지 않아야 한다. 양산시 문화ㆍ관광정책에 대해 들여다보자. 만약 양산시를 방문하는 방문객이 “양산을 대표하는 문화는 무엇입니까?”, “양산을 보여줄 수 있는 대표적인 관광 상품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우리는 망설임 없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가? 깊은 고민을 해봐야 할 것이다. 필자는 2년 전 양산시민신문 칼럼 내용에 양산을 대표할 수 있는 문화는 불교문화, 도자문화, 고대(신라+가야)문화로 집약한 글을 쓴 바가 있다. 이제는 양산시가 그동안 걸어온 도시발전만큼 우리 지역에 있는 소중한 지역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가령, 도자문화는 양산을 대표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자원과 인력구조를 갖추고 있다. 법기수원지와 법기리요지에 대한 도자마을 조성, 통도사와 주변 도예소(신정희요, 삼감요, 통도요 등)의 도자문화카페 조성사업 등을 제안해 본다. 이럴 경우, 크게는 일본 규슈의 아리타현과 같이 도자기 도시를 모델로 한다든지, 작게는 경주 천북면의 소현마을처럼 도자기편을 이용한 벽화마을 문화조성사업 등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최근 한 언론사의 칼럼에서처럼 양산읍성에 대한 복원사업을 제안하는 기사는 현실적으로 막대한 예산과 수십년 동안 장기적인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물론 양산시의 의지와 예산만 있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며, 양산읍성을 복원하는 사업에 대해 필자도 찬성한다. 다만 보다 현실적인 계획과 대안이 필요하며, 차라리 지금도 도시개발에 위협을 받고 있는 중요문화재에 대한 관리와 보존이 더욱더 절실하기 때문에 우선순위가 필요하다. 앞으로는 시민이 적극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양산의 문화ㆍ관광정책이 잘 펼쳐져 양산만의 지역화된 브랜드가 적극적으로 연구ㆍ개발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 문화ㆍ관광의 도시 양산을 지향하며… | 관리자 | 978 | |||||||||
공지 |
양산시민신문 기자 / mail@ysnews.co.kr ![]() | 판문점 선언과 남북공동 문화재 발굴조사 | 관리자 | 898 | |||||||||
공지 | "아라가야, 연맹왕국 아닌 고대국가로 봐야" 조수현 원장 연구논문, 기존 학설에 의문제기 "시기 구분 재설정 필요"역사 교과서에서도 6개 가야 연맹왕국의 하나로 거론되는 아라가야에 대해 새로운 주장이 제기됐다. 함안지역을 중심으로 한 아라가야는 연맹체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고대국가 단계까지 발전했으며, 통상적으로 가야를 전·후기로 나누는 것과 달리 '중기가야'를 별도로 분류하고 아라가야를 그 중심국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재)한반도문화재연구원 조수현(47·경주대 외래교수·사진) 원장이 경상대 대학원 문화재학과 박사학위 논문 '고분자료로 본 아라가야'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최근 가야 왕국들이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기존 학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연구들이 속속 나오는 가운데, 특히 드물게 '아라가야'의 유적 조사를 기반으로 한 연구논문이어서 주목을 받고 있다. 조 원장은 논문에서 "아라가야 고분군과 출토 토기를 통해 아라가야(함안)의 시기별 역사·문화 변천상과 사회구조를 분석한 결과 아라가야는 지역연맹체가 아닌 고대국가 단계까지 발전했다"고 주장했다. ![]() 그는 "아라가야 말이산고분군을 살펴보면 지배층의 고총이 5세기 3분기부터 집중적으로 축조되고, 고도(古都)지역 외에는 고총고분군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며 "이는 아라가야 영역 내에서 지배층의 고총체계가 획일적이고 말이산고분군에 지배계층의 권력이 집중됐음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이어 "아라가야는 가야읍을 중심으로 한 중심지역이 그 주변지역에 대해 직접지배방식을 행했고, 이를 통해 지역집단의 계층에 대한 위계화가 철저하게 통제·관리된 것으로 보인다"며 "말이산고분군을 왕묘로 한 가야읍 일대에 지배층의 권력이 집중된 중앙집권적인 국가임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는 아라가야의 영역이 대가야와 소가야처럼 광역화되지 않고 중심지역에서 대략 반경 20㎞이내의 비교적 작은 영역권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아라가야는 적어도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금관가야·대가야와 함께 가야사회의 중심국으로 성장·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조 원장은 "국사교과서에 서술된 가야사의 시기구분을 다시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우리나라 가야시기를 전기(김해)와 후기(고령)로 구분하는 현재 방식보다, 대가야가 발전하기 전인 5세기 전·중반대를 중기가야로 설정하고 아라가야를 중기가야의 중심국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초기국가의 지표를 아라가야 사회에 적용하면 아라가야는 4세기 후반에 초기국가로 성장했고, 5세기 전반대의 왕국(kingdom)을 넘어 5세기 후반 대가야와 함께 고대국가(state) 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하고 "그러나 당시 백제와 신라의 가야 진출에 따른 갈등과 전쟁이 빈번한 시기임을 감안하면 아라가야는 고대국가 단계에 진입은 했으나 더 이상 안정된 고대국가사회로 발전하지 못하고 신라에 의해 멸망(560∼561년)당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조 원장은 경상대 대학원에서 석·박사를 수료하고 함안박물관 학예연구사, 한국문화재재단 연구원, (재)경상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실장을 지냈으며 현재 양산에 있는 문화재조사전문기관 (재)한반도문화재연구원 이사장 겸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국내 학술등재지인 한국고고학보, 영남고고학보 등에 아라가야 관련 우수논문을 게재했고, 아라가야 관련 유적에 대한 다수의 발굴조사 경험을 통해 아라가야 고고학 전문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http://www.idomin.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라가야, 연맹왕국 아닌 고대국가로 봐야" | 관리자 | 1106 | |||||||||
공지 | 신라의 9주 5소경과 양주(양산)총관 김서현 장군 고대 양산은 부산, 울산, 대구 등 담당했던 거대 행정중심도시 신라 합병 이후 ‘삽량’보다 ‘양주’ 지명에 주목 논란 중인 박제상 관련 사업보다 양주총관 김서현 장군 연구 통해 김유신 장군 연계 사업 구상 필요 우리가 살고 있는 양산시의 역사와 문화는 알면 알수록 무척 찬란하다.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의 찬란한 과거 위상과는 달리 부산, 울산, 김해, 창원시에 둘러싸인 중소도시였으니 말이다. 지금은 그나마 이러한 도시발전 영향으로 양산시도 도시 발전이 이뤄졌고, 인구 유입도 꾸준히 증가해 이젠 제법 중견도시로서 면모를 찾아가고 있다. 그러나 갑자기 커진 도시 발전에 비해 아직까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정책 중 하나를 들자면 바로 문화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양산시가 중견도시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정책에 노력했다면 이제부터는 시민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문화에 대한 정책을 적극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사실 찬란한 양산이란 글의 표현처럼 1300년 전, 고대 양산의 역사와 문화는 양산시 역사 중에서 가장 찬란한 꽃을 피웠던 시기임은 분명하다.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 양산시를 현재의 도시 상황과 비교해보면 우리나라 수도가 있는 서울특별시를 둘러싼 경기도의 도청소재지인 수원시 정도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기록된 9주의 이름은 상주(尙州), 양주(良州), 강주(康州), 한주(漢州), 삭주(朔州), 명주(溟州), 웅주(熊州), 전주(全州), 무주(武州)로서 9주 소관 군현 수는 450군현에 이르렀다. 이 중 지금 양산에 주치를 둔 양주의 이전 지명은 5세기 초 박제상과 관련된 『삼국사기』 권45 열전5 박제상 및 『삼국유사』 기이2 김제상조에는 ‘삽량촌(歃良村)’ 또는 ‘삽라군(歃羅郡)’으로 기록돼 있다. 양주의 지명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의 “양주는 문무왕 5년, 인덕(麟德) 2년(665)에 상주(上州)와 하주(下州)의 땅을 분할하여 삽량주(歃良州)를 설치하였고, 신문왕 7년에 성을 쌓고, 경덕왕이 이름을 양주(良州)로 고쳤다”라는 기록이 있어 양주는 685년에 지명이 등장한 것을 알 수 있다. 양주는 당시에 12개 군(郡)과 34개 현(縣)을 관장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보면, 고대 양산은 지금의 부산, 울산, 밀양, 청도, 대구, 경산, 창원 등과 양주 내 금관소경인 김해까지 관할하는 거대한 행정중심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양산시에서는 신라 합병 이후 양산은 ‘샵량’이라는 지명보다 ‘양주’라는 지명에 대한 중요성을 부각할 필요가 있으며, 그 이전에 존재한 고대 양산의 가야국명(삽라국, 사라국)에 대한 연구는 지속적으로 연구돼야 할 것이다. 한편, 양주총관으로 기록된 인물 중에는 신라 삼국통일 주역인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인 김서현 장군이 유명하다. 김서현 장군은 7세기 전반에 활동한 인물로서 관등이 각찬(角飡: 17관등 중 제1위)에 까지 이르렀으며, 관직은 소판(蘇判)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 안무대량주제군사(安撫大梁州諸軍事)에 이르렀다고 한다. 양주총관(摠管)이 돼 여러 번 백제와 싸워 그 예봉을 꺾어 변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변방 백성들은 편안히 농사짓고 누에를 쳤으며, 군신은 국가 일에 골몰하는 근심을 없게 했다고 한다. 이러한 김서현 장군의 무덤을 양산시 향토사학자 중에는 양산부부총이 김서현 장군과 만명부인의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양산부부총은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축조된 신라의 석실분으로서 7세기 전반에 활동한 김서현 장군 무덤이 될 리는 만무하다. 이렇듯 제대로 된 지역사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양산시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이전 칼럼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행장관청에서 조차 ‘샵량주 시대’라는 혼동된 용어, 그리고 6세기대의 석성인 우불산성을 3세기대에 울산지역에 존재한 우시산국의 성으로 기사화된 내용은 두 번 다시 발생하면 안 될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최근에 양산시도 지역사 정립을 위한 예산을 반영해 서서히 문화정책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또한 근래 정부의 가야사 복원정책에 발맞춰 신라로 병합되기 이전 고대 양산의 국명과 성격에 대한 지역사 정립은 이미 실행 중에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미 울산과 경주에서 먼저 시행한 신라 재상 박제상과 관련된 각종 사업은 아직도 출생지에 대한 논쟁이 진행 중에 있으며, 사업구상이 상기 지역에 비해 뒤늦은 감이 많아 성공사례로는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지금부터라도 양주총관으로 있었던 김서현 장군에 대한 학술연구를 추진해 김유신 장군과 연계한 문화정책을 펼치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 | 신라의 9주 5소경과 양주(양산)총관 김서현 장군 | 관리자 | 8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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